인간다움을 정의하고 사유하는 것의 가치
기민정
그 어느 때보다도 편리하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답게 살기 어려운 시대다. 편리와 사람답지 못함이 공존한다는 점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편리’라는 말은 풀어 보면 편하고 이롭다는 뜻인데, 정작 편하고 이로운 것들이 가득한 사회는 비인간성이 만연한 것이다.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편하고 이로운 것 자체의 잘못은 아닐 테지만, 그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종종 개별 주체성을 상실당하고 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개별 주체성을 사회에 반납함으로써 얻는 재화로 개인은 다시 주체성을 구매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다.(정확히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을 제한 뒤 남은 만큼의 재화로 자아 표현이 이루어진다.) 무엇을 소비하는지가 그 사람을 충분히 설명하는 시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일정 부분을 사회의 구조를 유지하는데 기여하고 나서야 차등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인간성을 획득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아가 경쟁적으로 비인간적인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데 기여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데 일조한다는 것은, 극히 일부의 특권층을 제외하고서는, 사실 선택의 영역보다는 생존을 위한 분투에 가깝다. (여기서 생존은 단순히 배를 곪지 않고 살아남는 것만을 칭하지 않고, 자아실현, 행복 등 최소한의 인격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 전반을 이야기한다.) 때문에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일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를 구별하게 되는데, 이는 일터라는 삶의 공간에서 우선시되는 비인격적인 가치와 개인적 공간에서 갖는 인격적인 가치를 혼용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사람은 다층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삶을 완벽하게 구분하기란 불가능하다. 서로 다른 환경에 놓여 있을 뿐, 거기에 존재하는 개인은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꼰대’라고 칭하는 부류의 사람을 개인적 삶에서도 만나게 되는데, 나는 이것이 한 개인이 비인격적 가치를 내면화하여 인격적 삶에서도 적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위계적 질서라는 전근대식(그러나 효율을 위해 현대 사회에서도 여러 집단에서 사용되고 있는 가치)를 내면화한 것이다. 위계적 질서라는 가치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다양한 비인격적 가치를 내면화해 살고 있다. 경쟁의식을 필두로 한 신자유주의적 가치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치를 삶 전반에 내면화하는 일이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간다운 삶인가를 사유하는 것은 중요하다.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기 위해 참여한 도구적 행위에서 얻은 어떤 가치를 삶 전반에 적용했을 때, 우리는 그 삶을 인간답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인간의 가치관은 연속적으로 변화하고, 그 변화는 종종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세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가치관의 변화를 평가해야한다는 필요성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곤 한다.
이런 측면에서, 김기현의 인간다움은 몇 가지 키워드(그들 모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를 기반으로 삶을 돌아보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몇 가지 체계들을 훌륭히 서술했다고 느껴졌다. 특히 서양 철학의 역사를 기반으로 한 각 키워드에 대한 서술은, 여러 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각 가치에 대한 사유의 과정을 훌륭하게 표현해 멋진 내러티브를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대중서치고는 현학적인 표현들이 과하게 사용되어 읽기에 조금 지루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독자층을 겨냥한 문구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은 당신을 위한 가장 지적인 안내서’라는 점에서 해당 독자층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내용적 측면에서 저자는 공감과 이성, 자유를 세 가지 주요한 가치로 뽑았다. 공감과 이성을 묶어서 설명하고, 자유는 보다 책 전반에 걸쳐 독립적으로 서술되었다. 공감과 이성에 대한 설명은 다소 평이했다. 서양 철학을 기반으로 설명했는데, 역사적 사실을 제하고 풀어 쓴 내용 자체는 인의예지신과 같은 동양적 가치에도 보편적으로 적용할법한 서술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유에 대한 서술은 보다 아쉬웠는데, 봉건시대 권위주의에 맞선 인간적 존엄성이라는 구조를 현대 사회에 적용하여 확장하는 과정에서 AI, 4차 산업혁명과 같은 두루뭉술한 잠정적 존엄성의 적에 권위를 할당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저자가 인간다움을 과거 역사에서 이미 획득된 것으로 상정했다는 점은 특히 아쉽다. 역사에서 (모든 계층의) 인간이 권위주의에서 탈피한 완벽한 자유를 얻은 적이 단 한번이라도 존재했던가?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제국주의 시대에서 많은 식민지 국가가 존재했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권위주의의 질서 속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가? 우리 사회에 실재하는 권위에 맞서는 것과 다가올 권위에 맞설 것을 준비하는 것. 전자가 실질적인 전 계층을 아우르는 자유를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현재의 특권층이 혹시라도 박탈당할 ‘자유’에 대해 노심초사하는 것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주제에 맞추어 기술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아닐지, 하는 고민도 들었다. 나아가, 저자가 이야기하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박탈하는 ‘자유’가 어떤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사유도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현재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인간의 선택을 잠정적으로 유도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논리 또는 사회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 기반한다. 이에 대한 더 깊은 논의가 있었다면 보다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인간다움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사유해야할 점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인간다움을 이미 획득한 형질로 판단했다는 점은 아쉽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다움이 획득되었는가에 대한 고찰과, 그 근거가 있었다면 조금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논의가 부족했기 때문에, 특권 계층의 입장에서 쓰인 계몽적 글처럼 느껴진 것 같아 아쉽다. 그러나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인간다움을 고찰하는 것 자체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중요하다. 그러한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책을 높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