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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학기 "독서후담" 당선작 <소년이 온다> 서평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25-08-18 15:30:43
  • 조회수 235

꺼지지 않는 불꽃

한강의 <소년의 온다>를 읽고

 

김희수

 

작년 12월, 나는 미국에 있었다. 보스턴에 있는 한 연구실과 공동 연구를 하며 반년을 그곳에서 지냈다. 미국은 12월 초부터 연말 분위기가 만연하다. 나도 슬슬 미국 생활에 적응했던 터라 긴장을 풀고 연말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그랬다. 

12월 3일.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데, 갑자기 핸드폰 알림이 미친 듯이 울려 댔다. 단체 채팅방에 들어가서 처음 본 것은 도로를 지나는 탱크 사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비상계엄, 계엄군, 계엄 해제…… 생경한 단어들이 채팅방에 계속해서 올라왔다. 나는 연구실에 도착해서 인터넷 뉴스를 찾아보고 나서야 얼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한국의 계엄령은 연구실에서 꽤 인기 있는 스몰 토크 주제가 되었다. 연구실 동료들은 뉴스에서 소식을 들었다며 다 괜찮을 것이라는 위로를 내게 전한 채 실험을 하러 갔다. 그럼 나도 고맙다고 말하고 다시 실험을 했다. 나라가 어찌 됐든 나는 할 일을 해야 했다.  

한동안 밤마다 한국의 뉴스를 찾아봤다. 날마다 새로운 소식이 추가되어서 흐름을 쫓아가기가 어려웠다. 비상계엄은 해제되었고, 일들은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점점 한국의 일은 나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나와는 동떨어진 일처럼 느껴졌다. 그곳은 밤인데 이곳은 낮이니까. 그곳의 하늘은 메말랐는데 이곳에는 눈이 내리니까. 이곳에서는 그곳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까. 

시간이 지나고 올해 봄에 나는 한국에 돌아왔다.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은 탄핵당했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그렇게 지난겨울의 일은 기억 속에서 잊혔다. 

그리고 겨울의 한기가 흔적조차 남지 않은 무더운 7월에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괴로웠다. 차오르는 눈물 탓에 몇 번이고 책을 덮어야 했다. 그들의 아픔이 너무 생생해서 읽는 것만으로 통증이 느껴졌다. 고문을 묘사하는 부분은 도저히 읽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눈물을 닦고 다시 책을 펼쳤다. 반드시 다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런 의무감을 느꼈다. 살아남은 시민군들이 남긴 증언처럼.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학살과 고문 앞에서도 눈을 뜨고 앞을 응시하던 그들 앞에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그러다 2009년 1월의 용산을 보며 1980년 5월의 광주를 떠올리는 장면을 읽은 순간, 잊은 줄 알았던 지난 겨울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멀게만 느껴지던직접 보지 못한 그날이 그려졌다. 1980년 5월의 광주 위에, 2009년 1월의 용산이 겹쳐진다. 그 위에 모든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 겹쳐진다. 그리고 그 위에 2024년 12월의 서울이 겹쳐진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과거인 동시에 현재이자, 미래였다. 

그날의 일들을 동영상 플랫폼에 검색했다. 내가 놓친 장면을 보고싶었다. 아니, 보아야했다. 처음으로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는 영상을 보았다. 국회의원을 저지하는 계엄군의 영상을 보았다. 그곳에는 과거의 망령을 다시 불러오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과거의 어둠을 다시 가져오려고 했다. 부름을 받은 폭력이 다시금 우리를 찾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한발 먼저 도착한 것이 있었다.  

국회위원들이 담을 넘는 영상을 보았다. 시민들과 계엄군이 대치하는 영상을 보았다. 이어지는 영상을 따라가다 시민들이 시위하는 모습을 담은 라이브 클립에까지 이르렀다추운 겨울임에도 광장은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응원봉을 흔들며 하나의 구호를 외쳤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불꽃이 날개처럼 파닥거렸다.  광경을 보며 나는 다른 불꽃들을 떠올렸다. 소년이 친구를 기리며 빈 음료수병에 끼워 넣은 불꽃. 그녀가 눈으로 덮인 소년의 무덤 앞에 올려놓은 불꽃. 어둠이 드리울 때마다 타오르던 수많은 불꽃.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언제까지고 우리는 우리를 구할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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